후쿠다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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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다 하지메는 1902년 후쿠이현 오노시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도메이 통신사 기자 생활을 거쳐 정계에 입문하여 중의원 의원을 14번 역임했다. 통산상, 자치상, 법무상 등을 역임했으며, 제62대 중의원 의장을 지냈다. 소비세법안에 반대하며 자민당을 탈당했고,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1997년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종2위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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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하지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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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후쿠다 하지메 |
원어명 | 福田 一 |
로마자 표기 | Fukuda Hajime |
출생일 | 1902년 4월 1일 |
출생지 | 후쿠이현 오노시 |
사망일 | 1997년 9월 2일 |
사망지 | 도쿄도 이타바시구 |
학력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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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일본자유당 민주자유당 자유당 자유민주당 (오노파→후쿠다G→무파벌) 무소속 |
칭호/훈장 | 종2위 [[파일:JPN Toka-sho BAR.svg|40px]]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파일:ITA OMRI 2001 GC BAR.svg|40px]]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카발리에레 디 그란 크로체 중의원 영년 재직 의원 법학사 (도쿄 제국대학, 1927년) |
국회 | |
직책 | 제62대 중의원 의장 |
취임일 | 1980년 7월 17일 |
퇴임일 | 1983년 11월 28일 |
원수 | 쇼와 천황 |
내각 | |
직책 | 제35대 법무대신 |
내각 | 후쿠다 다케오 내각 |
취임일 | 1976년 12월 24일 |
퇴임일 | 1977년 10월 5일 |
국가 행정 | |
직책 | 제31-32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내각 |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2차 개조 내각 미키 내각 |
취임일 | 1974년 11월 11일 |
퇴임일 | 1976년 9월 15일 |
지방 행정 | |
직책 | 제19·22-23대 자치대신 제33·36-37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내각 |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제2차 개조 내각 미키 내각 |
취임일 | 1972년 7월 7일 |
퇴임일 | 1972년 12월 22일 1974년 11월 11일 - 1976년 9월 15일 |
산업 | |
직책 | 제21·22대 통상산업대신 |
내각 | 제2차 이케다 제2차 개조 내각 제2차 이케다 제3차 개조 내각 제3차 이케다 내각 |
취임일 | 1962년 7월 18일 |
퇴임일 | 1964년 7월 18일 |
기타 | |
기타 직책 | 중의원 의원 (후쿠이현 전현구) 당선 횟수 14회 |
임기 시작 | 1949년 1월 23일 - 1955년 1월 24일 1958년 5월 22일 |
임기 종료 | 1990년 1월 24일 |
기타 직책 | [[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18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
총재 | 다나카 가쿠에이 |
임기 시작 | 1973년 |
임기 종료 | 1974년 |
2. 생애
1902년 4월 1일 지금의 후쿠이현 오노시에서 태어났다.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1927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불법과를 졸업했다.[1] 도메이 통신사 기자를 거쳐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통산대신, 자치대신, 법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통산대신 시절에는 소설 「관료들의 여름」에 그려진 이마이 요스케와 사하시 시게루 사이의 사무차관 인사 항쟁에 개입하여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히메유리의 탑 사건 당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다. 미키 다케오 수상 이하, 미키 내각의 각료들이 사건 전에는 낙관론에 근거하여 경비 인원을 감축한 후, 사건이 발생하자 경비 책임자였던 사사 준코를 질책한 것에 대해, 황태자 아키히토 친왕 부부의 무사를 들은 후쿠다는 "다행이다, 사사 씨는 처음부터 화염병이 날아온다고 말했으니까"라고 안도했다고 한다. 후에 사사는 후쿠다를 "머릿속에서 최악의 지옥도를 상정하고 있던 위기 관리 리더의 이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97년 9월 2일 도쿄도 이타바시구의 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95세.[1] 사후 종2위에 추서되었다. 현지에서는 "핀 씨"라고 불리며 존경받았다.
2. 1. 정치 활동
1902년 4월 1일 지금의 후쿠이현 오노시에서 태어났다. 도메이 통신사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47년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년 뒤 총선에서 당선돼 정치인이 되었다.[1]1962년 7월 이케다 하야토 총재 때 통산상으로 처음 입각하여 2년을 재임했으며, 이후 1972년 7월 다나카 가쿠에이 총재 때 자치상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을 5개월 역임했다. 1974년 11월 미키 다케오 총재 때 다시 자치상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겸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이 되어 1년 10개월을 재임했으며, 1976년 12월 후쿠다 다케오 총재 때 10개월간 법무상을 지냈다.[1]
자치상으로 재임하던 1975년 1월 21일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나는 이치카와 후사에 씨만큼 국민을 존경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했다가 야당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후쿠다는 발언을 취소한 뒤 사죄했다.[2] 같은 해 6월에는 도쿄도의 일본무도관에서 진행된 전 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의 국민장에 총리대신 미키 다케오가 참석했다가 우익 인사로부터 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가공안위원장이던 후쿠다는 사건이 발생한 지 4시간이 지나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청 장관 및 이하 간부를 불러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할 것을 지시했다"라고 밝혔으며, 사건을 사전에 막지 못한 것에 대해서 사과했다.[3]
법무상으로 재직하던 1977년 9월 28일에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을 일으킨 일본적군은 일본에서 복역·구류 중인 일본적군 멤버 9명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후쿠다는 검사총장 가미야 히사오 등과 함께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하지만 총리대신 후쿠다 다케오는 "사람의 목숨은 지구보다 무겁다"라며 범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석방 이후 후쿠다 하지메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법무상을 사임했다.
호쿠리쿠 신칸센의 노선이 발표되었을 때 당초에는 후쿠이역까지로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다음 날에 미나미에치역(에치젠타케후역의 임시 명칭)까지 연장되었다. 원래 노선이 미나미에치역까지로 절충이 이루어졌었는데 후쿠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노선을 축소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쿠다가 화를 내서 다음 날에 급히 변경되었다.
1980년 7월에 제62대 일본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1983년에 록히드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전 총리대신 다나카 가쿠에이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야당은 다나카의 의원 사직 권고 결의안을 상정하려 했고, 자민당이 이를 막아서면서 국회가 공전했다. 후쿠다는 참의원 의장 기무라 무쓰오와 함께 정부 중요 법안의 심의 촉진을 조건으로 해산 후 총선을 치를 것을 야당에게 제안했다. 야당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중의원 해산이 이루어졌다.
1988년 「소비세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었을 때 반대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법률안이 통과되자 후쿠다는 "선거구민에게 소비세 도입은 없을 것이라 설명했는데 면목이 없다. 유권자를 배신할 수 없다. 이는 자민당이 나를 배신한 것이다"라며 자민당을 탈당해 버렸다. 당황한 자민당 집행부는 전현직 총리대신과 간부, 파벌 회장 등이 총출동하여 후쿠다를 설득했으나 후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후 후쿠다는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후쿠다가 정계를 은퇴하자 후원회가 후쿠다의 사위를 후계자로 옹립했지만, 후쿠다는 "정치는 세습해선 안 된다"라며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 캠프에서는 후쿠다의 이름인 '一' 자를 강조하는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고심했지만, 세습에 반대하는 후쿠다의 뜻에 동조한 유권자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아 낙선했다.
연도 | 직책 |
---|---|
1949년 1월 | 중의원 의원 첫 당선 |
1962년 7월 | 통산산업대신 (제2차 이케다 하야토 내각) |
1972년 7월 | 자치대신·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제1차 다나카 내각) |
1974년 11월 | 자치대신·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제2차 다나카 내각·미키 다케오 내각) |
1976년 12월 | 법무대신 (후쿠다 다케오 내각) |
1980년 7월 | 제62대 중의원 의장 |
1990년 1월 | 정계 은퇴 |
2. 2. 정계 은퇴 이후
후쿠다는 1988년 「소비세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었을 때 반대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법률안이 통과되자 "선거구민에게 소비세 도입은 없을 것이라 설명했는데 면목이 없다. 유권자를 배신할 수 없다. 이는 자민당이 나를 배신한 것이다"라며 자민당을 탈당했다.[1] 당황한 자민당 집행부는 전현직 총리대신과 간부, 파벌 회장 등이 총출동하여 후쿠다를 설득했으나 후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후 후쿠다는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고 정계를 은퇴했다.후쿠다의 정계 은퇴 후, 후원회는 후쿠다의 사위를 후계자로 옹립했지만 후쿠다는 "정치는 세습해선 안 된다"라며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1] 캠프에서는 후쿠다의 이름인 '一' 자를 강조하는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고심했지만, 세습에 반대하는 후쿠다의 뜻에 동조한 유권자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아 낙선했다.
3. 평가
동맹통신 기자를 거쳐 중의원 의원이 된 후쿠다 하지메는 통산대신, 자치대신, 법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통산대신 시절에는 소설 「관료들의 여름」에 묘사된 사무차관 인사 항쟁에 개입하여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1]
1975년 1월 21일 자치대신 재임 중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나는 이치카와 후사에 씨만큼 국민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해 야당의 반발을 사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했다.[2]
히메유리의 탑 사건 당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후쿠다는 미키 다케오 수상을 비롯한 미키 내각 각료들이 경비 인원을 감축했다가 사건 발생 후 경비 책임자였던 사사 준코를 질책한 것과 대조적으로, 황태자 아키히토 친왕 부부의 무사 소식에 안도하며 사사의 예측을 언급했다. 사사는 훗날 후쿠다를 위기 관리 리더의 이상으로 평가했다.
1975년 6월 사토 에이사쿠 전 수상의 국민장에서 미키 수상이 우익에게 폭행당한 사건 발생 4시간 후, 후쿠다는 국가공안위원장으로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 간부들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겠다고 밝히고 사과했다.[3]
법무대신 재임 중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 발생 시, 범인 석방에 반대했으나 후쿠다 다케오 수상의 초법규적 조치 방침에 따라 일본 적군 멤버를 석방하고 대신직을 사퇴했다.
1980년 제62대 중의원 의장에 취임한 후쿠다는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수상에게 1심 유죄 판결이 내려지자 의원 사직 권고 결의 상정을 요구하며 국회가 공전되자, 중재안을 제시하여 중의원 해산을 이끌어냈다(다나카 판결 해산).
소비세 법안 채결 시 반대표를 던지고 자민당을 탈당했는데, 이는 선거구 주민에게 소비세 도입은 없다고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자민당의 설득에도 후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계 은퇴 후, 후쿠다는 사위의 정계 진출을 반대하며 "정치는 세습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현지에서는 "핀 씨"라고 불리며 존경받았다.
4.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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